기원전 8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리더십 아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여 이스라엘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였으며 경제정책에도 성공하여 문자 그대로 부국강병의 시대를 가져왔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에 전에 없었던 종교적 부흥이 일어났음도 알 수 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때 종교와 예배가 부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이때 처럼 윤리가 타락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모스는 갖은 자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고발하면서 그들이 갖지 못한 자들을 어떻게 수탈하고 있는지를 통열하게 지적했다. 윤리의 타락이다. 왜 이 시대에 윤리가 전락했는가? 심각한 영적타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세아의 아내는 몸을 파는 여성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어찌 인간과의 신의를 지키려 하겠는가? 종교는 부흥했으나 영성은 메말라 간 8세기 초중반의 모습–이야말로 두 얼굴이다!

영성의 척도는 교인 숫자와 예배 횟수의 증가가 아니다. 경제적 풍요 속에 사회정의가 사라진 이유는 영성이 심각하게 곡해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2-24; 미 6:6-8 참조).

이 시대에 사역했던 또 한 사람의 선지자는 아밋대의 아들 요나이다 (욘1:1; 왕하 14:25). 8세기 초중반 이스라엘에 만연했던 영적 타락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선지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갔던 것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풍과 큰 물고기를 이용하여 요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니느웨로 돌려보냈다. 이제 요나에게 흔히 말하는 두번째 기회가 왔다.

그는 드디어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어쩐일인가? 이 메시지가 니느웨 주민들의 영혼을 찔러 엄청난 회개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니느웨의 왕조차 보좌에서 일어나 베 옷으로 갈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회개하기 시작했다. 이 회개의 운동은 왕명을 힘입어 더욱 강력해졌으며 결국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고 니느웨를 구원하셨다.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통해 당대 세계 제일의 도시를 구원한 메신저 요나, 그런데 이에 대한 요나 자신의 반응은 실로 얼토당토 않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는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1-3). 이것은 무슨 말인가? 요나는 하나님께 니느웨를 구원하지 말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니느웨를 구원하려면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투정하고 있지 않는가? 무엇이 요나의 문제인가?

요나가 갖은 문제는 다름 아닌 두 얼굴의 문제였다. 그가 전했던 메시지와 그의 영혼 깊이 타고 있는 불꽃의 본질이 달랐던 것이다. 그가 비록 니느웨에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했으나 그의 영혼 깊이 그가 진정 소망했던 것은 니느웨의 멸망이었다. 그의 메시지와 그의 인격은 완전히 분리되어있었다. 정확히 말해 니느웨는 요나의 메시지로 인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요나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이다.

정신분열증을 영어로 schizophrenia 라고 한다. 마음 (-phrenia) 의 갈라짐 (schism) 이다. 마음이 분열되었으니 이런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일관성이 없다. 그나마 정신분열증 환자를 변호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각각 따로 논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다. 이들은 위선자이며 이중인격자이다.

위선자도, 정신분열증 환자도 리더가 될 수 없다. 리더가 전하는 메시지와 리더의 삶에 괴리가 있을 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존경을 잃어버린 리더는 곧 리더십을 잃을 수 밖에 없다. 리더십은 포지션이 아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갈수록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메시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2000 년 기독교 역사상 지금 처럼 메시지가 많았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메신저의 삶과 인격이 그가 전한 메시지와 동일선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얼굴의 지도자는 리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