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말 한마디를 말하라고 하면 아마 “No!”라는 말일 것이다. 아내가 부탁할 때, 아이들이 소원할 때, 친구가 요구하고, 교인들이 요청할 때, 때로는 나 자신이 원할 때, 여기에 대해 “No”라고 말하면서 거절하는 것은 보통 소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다 나아가 그 부탁의 내용이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 것이 아니라면 더욱 이러한 요청에 귀를 닫아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요청에 “Yes”하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청을 수용한다면 이 사람은 리더가 아니다. 자신이 가야 하는 방향과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우선순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요청에 대해 계속 “Yes”라고 말한다면 그는 주도적으로 삶은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다. 주도성은 리더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리더가 되기 위해 타인에 대하여 ‘터프가이’(tough guy)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대부분의 경우 리더가 아니다.

느브갓네살의 통치하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탁월한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가야 하는 방향과 우선순위가 분명했다. 비록 이방 국가에 포로로 잡혀왔으나 이들은 준수한 외모와 학문적 탁월함, 또 가문의 명성으로 인해 바빌로니아의 궁정 스태프로 선택된 극소수의 귀족 청년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바빌로니아 왕의 뜻대로 사는 대신 하나님의 사람답게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뜻을 세웠다(단 1:8).

모든 인간은 먹고자 하는 욕망, 성적 만남을 원하는 욕망, 홀로가 아닌 타인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세 가지 본능적인 욕망이 있다고 한다. 이중에서도 1순위는 단연코 먹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뜻을 세운 이후 인간의 본능적 욕망 중 가장 근원적 욕망을 절제하였다. 왕의 특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이다(단 1:8). 식욕을 절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형선고와 함께 병원이 고칠 수 없다고 포기한 환자가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먹지 말아야 할 달고 맛있는 음식에 손이 가는 것은 보통사람이라면 이겨낼 수 없는 유혹이다.

행여 먹는 문제를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학문과 가치관에 대한 절제는 어떠한가? 왕명에 따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갈대아 사람의 언어와 학문’을 배워야만 했다. 갈대아인의 가치관을 따라 그들의 사고방식을 세뇌시켜야만 바빌로니아 왕이 이들을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3대 본능 중 가장 근본적인 본능조차 절제했던 이들은 바벨론의 학문을 스스로 걸러내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 다이어트는 음식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학문과 지식의 영역,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가치관도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통전적인 변화를 통해 결국 리더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성품(character)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바벨론의 학문조차 스스로 절제하여 자신이 세속적 가치관에 완전히 노출되는 것을 허락치 않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오히려 탁월한 지적 성장과 성숙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1:17).

당시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강자가 베푼 물질적, 교육적 호의와 요청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마음을 정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정하고, 그 정한 마음대로 실천하는 리더는 믿을 수 있다. 견고함이 그들의 닉네임이다. 대중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리더를 신뢰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걸쳐 결의한 것이라면 결의한 바를 지켜갈 수 있는 리더에게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No”라고 말하면서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일하려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리더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리더로 살아간다. ‘풀무불’(단 3) ‘사자굴’(단 6) 등이 그 대가이다.

다니엘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조국이 멸망한 이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와 치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토라에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신실하게 지키셨고, 축복하셨고, 사용하셨다. 한 마디로 말해 본문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다. 믿을 수 있는 리더, 견고한 바위 같은 리더. 그에게는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과 ‘풀무불’, ‘사자굴’이 따라다닌다. 물론 “No”라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풀무불’도 ‘사자굴’도 없다. 나아가 “리더십”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