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발전을 도와 줄 수 있는 멘토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번 이사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엘리사는 엘리아의 영권을 전수받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과 동행했다. 멘토에게서 배우겠다는 집요한 열정이 멘티에게 없다면 멘토링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멘토링 사역의 회복을 위해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다시 말해 누가 누구를 찾는가?  멘티인가 멘토인가, 누가 먼저 시작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님이 어떻게 멘토링 사역을 시작하셨는지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1:17).  “또 지나가시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2:14).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3:13).  주님은 제자가 스승을 찾도록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계획을 따라 자신의 사역을 가장 잘 계승할 가능성을 갖은 이들을 주님이 직접 찾아 부르셨고 3년반 동안 그들과 삶은 나누면서 멘토링하셨다.

밀리언 셀러인 <주님의 전도계획> 에서 저자 로버트 콜만은 예수의 제자훈련을 다음의 8 단계로 분석했다:  선택, 동거, 성별, 분여, 시범, 위임, 감독, 재생산.  이 8 단계 훈련과정의 목표는 재생산이 가능한 사람을 적절하게 분별하여 선택한 이후 그를 훈련하여 그가 또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영적리더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의 최종 목표가 재생산이라면 그 시작은 재생산이 가능한 사람을 ‘선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멘티의 책임이 아닌 멘토의 사역이다.  제자훈련 받을 사람은 모집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자가  제자훈련 받아야 할 사람 (재생산이 가능한 사람) 을 발탁하여 권고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존 멕스웰은 자신의 저서 <리더십의 원리 2.0> 에서 이렇게 말한다:  “리더는 중요할 뿐 아니라 ‘신성’하기까지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타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인식해 내는 능력이다.  성공적인 리더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의 하나는 가능성 있는 리더를 발굴하여 훈련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일은 아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인간관계론>, <자기관리론> 등 자기계발서의 원조로 널리 알려진 데일 카네기는 거의 70년전 세상을 떠났지만 카네기 리더십코스를 통해 여전히 그의 영향력을 우리세대에 미치고있다.  카네기의 생전에 어느 신문기자가 물었다.  “당신의 회사 직원 중 43명의 백만장자가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어떻게 백만장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까?”  카네기는 대답했다.  “내가 그들을 고용했을 때 그들은 백만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백만장자가 되었던 이유는 그들이 나와 함께 일한 결과일 뿐입니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이 43명의 사람들을 탁월하게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을 무엇인가요?” 카네기는 대답했다.  “인간은 금이 제련되듯이 개발됩니다.  금광석에서 일 온스의 금을 추출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톤의 불순물을 먼저 추출해 내어야 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광산에 들어갈 때 불순물을 찾아내겠다는 의도로 광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금을 찾아내겠다는 의도로 광산에 들어갈 뿐입니다.  제가 긍정적이고 성공적인 사람을 찾아내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저는 불순물이 아닌 정금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눈으로 사람을 보면 볼 있다면 불순물보다 그 속에 있는 정금이 보이기 시작할것 입니다.

모세가 진정한 리더로 거듭난 날은 장인 이드로의 멘토링을 받은 날이다.  멘토링은 장인이 사위에게 준 ‘훈수’ 이었지 사위가 장인에게 요청한 도움의 일부는 아니었다.  우리의 교회와 교단이 진정 미래를 준비한다면 미래의 지도자를 키워내어야한다.  그리고 이 일은 신학대학 교수들에게만 맞겨야 할 일이 아니다.  리더가 가능성있는 금광석을 찾아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금만 나오도록 훈육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트로이 전쟁 중 오디세우스 왕은 전쟁에 나가야 했다.  이후 왕의 단짝 친구 ‘멘토’는 친구의 아들을 자신의 친아들 처럼 훈육하였다.  따듯하게 이해하고 받아준다고만 해서 사람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다.  엄히 꾸짓고 나무란다고 해서 도덕적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훈육은 과학이 아닌 예술이다.  멘토는 10년의 세월동안 최선을 다해 친구의 아들 속에 잠재된 인격과 정서가 훌륭하고 성숙되게 표출되도록 도와주었다.  전쟁을 마친후 자신의 왕국에 돌아온 오디세우스 왕은 성숙한 인격을 갖춘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을 보고는 너무나도 만족하여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훈육해 준 친구를 향해 이렇게 칭찬하였다.  “친구, 진심으로 감사하네.  역시 자네 (멘토) 답네!”  이 이후 그리이스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을 멘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교단의 모든 목회자가 멘토가 되어 한 사람의 차세대 리더를 발굴하여 키워낼 수 있다면 교단의 미래는 밝고 건실하다.  꼭 기억하자.  멘토링 관계를 시작해야 할 사람은 멘티가 아닌 멘토이다.

[정태회 목사의 삶, 안목, 리더십] 멘토링 (3) – 누가 시작해야 하는가, 멘티 or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