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국정원이 북한 군부 및 김정일과 관련된 직무상 비밀을 누설한 혐의로 전 국정원장을 검찰에 고발한 적이 있다. 이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샘물교회 선교팀을 탈레반과 협상 이후 귀국시키면서 자신의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한때 국정원의 모토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정보원이 과업 성취를 위해 신분을 숨긴 채 일하는 것은 정보 관련 업무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분은 자신을 노출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모 교수는 이분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땅에 떨어진 국정원의 위상을 회복시키고 나아가 다음번 대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속셈에 따라 의도적으로 연출된 행동이라며 그를 비난하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리더도 예외는 아니다. 무조건 자신의 업적을 들어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리더라면 자기과시욕으로 가득한 허접한 리더일 수 있다. 교회 리더들 가운데 이런 사람은 흔치 않다. 교회 지도자인 우리의 자기 과시욕은 보다 은연중에 드러난다.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부족 동맹국가의 초대 왕이 될 수 있었던 제안을 추호의 미련도 없이 거절한 하나님의 사람 기드온, 그는 자신을 왕으로 삼는 대신 각자가 탈취한 귀고리를 자신에게 선물로 줄 것을 부탁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전리품 중 금 귀고리를 (이와 함께 미디안 인들의 초승달 장식, 각종 패물, 미디안 왕들의 자색 의복과 낙타의 장신구)를 기드온에게 주었다. 엄청난 양의 금 귀고리였다(26절). 기드온은 그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성읍인 오브라에 두었다.

기드온의 은밀한 이율배반을 보라. 고대 사회에서 전리품은 왕에게 바쳐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바친 금 귀고리의 양과 가치는 가히 왕의 보고(寶庫)를 채울만한 정도였다. 나아가 기드온은 미디안의 왕들이 입었던 의복과 장신구를 서슴없이 받아 간직하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헌납받은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성에 두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성읍을 성역화하고 있다. 물론 그 종교의 수반은 자신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들어오던 날 다윗은 옷이 벗겨지는지도 모른 채 춤을 추었다. 물론 기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도 유다에도 속하지 않았던 여부스 족속의 땅 예루살렘을 탈취하여 그곳에 천도함으로 다윗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중립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의 정치적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언약궤조차 예루살렘 다윗성에 들어온 순간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조차 수장이 되었다. 고대 사회의 정치적 수반은 항상 종교적 수반이기도 했다. 아직도 영국교회의 수반은 여왕이다. 왜 다윗이 기뻐 춤추지 않았겠는가!

리더가 싸워야 할 가장 가공할 적은 항상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 성경은 기드온이 가졌던 은근한 권력욕의 결과를 이렇게 고발한다. “그것(에봇)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27절). 왕이 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언했으나 모든 상황은 자신이 왕이 되는 쪽으로 일을 만들어간 기드온, 이런 유혹은 기드온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교회 리더가 이런 유혹에 넘어간다면 기만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야욕을 이루어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속고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기 마련이다. 한 번의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고, 한 번의 기만은 또 다른 기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기만이 끝은 파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