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 제커라이아스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공통적으로 라비의 설교는 내용이 깊고 풍성하며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깊고 풍성한 내용에 더해 전달능력 조차 탁월하다면 감동은 보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깊고 풍성하며 감동적인 설교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설교자의 연구생활이 깊고 풍성하면 된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란 목회사역 중 깊고 풍성한 연구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목회자가 셀프리더십을 통해 자신을 관리한다면 시간확보는 가능하다.  설교(준비) 처럼 철저하게 리더십을 요구하는 영역도 없다. 

셀프리더십이란 1986년 미국의 경영학자 Manz가 제안한 개념으로, “자기 스스로 리더가 되어 자기 자신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말한다.  리더가 리드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은 언제나 리더 자신이다.  철저한 설교준비를 위해 연구시간을 확보하려면 목회자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분명한 우선순위는 목회자의 자기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소명받은 목사로서 본인의 최우선과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임을 “뼈져리게” 느끼지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요구되는 끝없는 요청들에 대해 “No” 혹은 “Not now” 라고 말하면서 연구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회자가 분주한 목회스케줄에 이리저리 밀리다보니 설교본문을 정하고나면 “설교준비”를 위해 곧바로 주석을 읽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이런식의 “설교준비”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성경해석가로서 실력은 늘지 않는다.  실력은 오직 연구를 통해서만 배양된다.  연구는 길고 지루하며 험란한 과정이다.  한, 두시간 연구했다고 눈에 보이는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니다.  연구의 시간이 쌓이고 지식이 축적되어야만 성경해석가로서의 역량이 증가한다.  그렇게 되면 연구의 시간은 발견의 기쁨과 감동으로 충만해진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받은 감동을 자신의 메시지에 담게 되면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은 감동받을 수 밖에 없다.  라비의 설교가 내용이 깊고 풍성하며 감동적인 이유는 그의 깊은 연구생활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깊이 연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는 이유는 성서해석학과 설교학을 배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셀프리더십을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라비의 설교가 깊고 풍성하며 감동적인 이유는 그의 설교에 포함된 강력한 신학적 인사이트 때문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대부분은 신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신학적 답을 필요로하는 실존적 갈등 속에 살고 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왜 이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있을까?”  “모든 것이 상대적인 이 사회에 어떻게 절대적 윤리관을 주장할 수 있을까?”  “죽음 이후는 어떠한가?”  “정말 성경을 신뢰할 수 있을까?”  이런 주제들은 모두 조직신학적 주제들이다.  설교를 통해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일관적고도 무게있는 답을 줄 수 있을 때 설교는 강력해 진다.

70-80년대 부흥운동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한 때 “지성과 영성은 서로 대치하는 상반된 덕목”이라는 이원론에 잡혀 있었다.  내가 신학교에 진학했을 때의 분위기는 “깊은 기도생활을 통해 영성맨이 되어 주님의 쓰임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머리만 키워” 백해무익한 목사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고전 1:26-29를 인용하면서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설교자는 하나 같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역설했던 유명 강해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이라고 외쳤던 것이 30년도 훨씬 더 된 기억으로 뇌리에 생생하다.

그러나 신학교육을 받아보니 기독교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초대 교회에 가장 탁월한 지성은 바울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머리는 키웠으나 가슴이 차가운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당대 제일의 복음전도자였고 실천가였다.  중세 교회의 문을 연 어거스틴 역시 당대 제일의 신학자이며 실천가였다.  개혁자 루터, 칼빈, 츠빙글리 모두 당대 제일의 신학자이며 실천가들 이었다.  영성운동으로 영국과 미대륙을 휩쓸었던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출신이다.  제 1차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요나단 에드워드는 예일 출신이며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  제 2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이며 19세기 부흥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진 챨스 피니는 변호사였으며 오블린 칼리지의 총장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로이드 존스는 영국왕실 주치의였으며 20세기 제일의 강해설교자였다. 빌리 그래함은 M. Div. 과정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암스텔담 86 복음전도자 대회 개막설교에서 그가 “전도사역”을 정의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전도사역의 본질을 이토록 간략하고 분명하게  “정의” 할 수 있다면 그는 “전도학 교수”의 지식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라비 제커라이아스는 “붙타는 지성” (Intellect on Fire) 로 알려져 있다.

깊고 풍성하며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면 설교자는 신학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학교 졸업과 함께 대부분의 목회자는 신학서적 탐구에도 손을 놓는다.  얄팍한 “How To” 서적은 무게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라비의 설교가 깊고 풍성하며 감동적인 세 번째 이유는 그의 메시지가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현대교회와 설교> 라고 제목 지어진 존 스타트의 설교학 책 원제는 <Between Two Worlds–두 세계 사이에서> 이다.  스타트에 의하면 설교자의 역할은 고대의 본문과 현대인의 삶은 연결하는 다리는 놓는 것이다.  고대 본문이 주는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 내는 것은 해석학적 실력이다.  깊은 연구를 통해 이것을 찾아내는 것은 설교자의 임무 중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찾아낸 진리를 현대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다 (나는 해석1/3, 적용 1/3, 전달을 1/3로 본다–전달은 내용만큼 중요하다).  

설교 준비가 주석의 내용을 카피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청중이 우리의 설교에 감동받을 수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석은 고대본문을 해석할 뿐이지 적용점을 제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청중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을 연발하고 “은혜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해석이 심오해서가 아니다.  설교가 제시하는 적용점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본문에서 찾아낸 교훈을 현대인의 삶에 가장 강력하게 적용시키는 방편은 적절한 현대적 스토리 (예화) 를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신학이론”에 커넥트 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에 커넥트되어 감동받는다.  라비는 철학, 문학, 역사, 과학, 시사, 생활등에서 다양하고 절적한 예화를 사용하여 고대의 본문을 현대의 삶에 가져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그의 풍성한 독서와 연구의 산물이다.

서재에 가지고 있는 예화집을 모두 정리하라.  미리 만들어진 예화 중 사용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끊임없는 독서와 습관화된 삶의 기록을 통해 예화 파일을 스스로 만들어나가지 않는다면 감동적인 설교를 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이것 역시 열정적인 연구생활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시간에 쫓겨 대충 만든 설교로 청중에게 감동을 선사할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철저한 연구생활, 끊임없는 신학탐구, 현재적인 적용점과 적절한 예화의 발굴은 셀프리더십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설교를 기도의 용광로 넣어 성령의 불로 곱삶은 이후 그 농축된 진리를 가슴에 불을 안고 외칠 때 청중의 눈에 메시지와 메신저는 드디어 하나가 된다.  그런 설교를 들은 청중은 이렇게 반응한다.  “이 메시지는 얼마나 내용이 깊고 풍성한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오직 저 목사님만 전할 수 있는 . . . .””  이때 메시지는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며, 메신저는 존경받고, 메시지의 주인인 하나님은 예배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