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질문은아마 이것일 것이다.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이런 질문은 질문을 통해 무엇인가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이지 결코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수사학적 기법을 무시하고 자신이 얼마나 신실한 창조론자인가를 밝혀야 하는강박주의자는 서슴없이 “닭이 먼저” 라고 답할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던가?  어떤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화의 법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상대를 당혹하게 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리더가 먼저인가 리더십이 먼저인가?  리더십이 리더를 만드는가 아니면 리더가 리더십을 창출하는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은이런 것일 것이다.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인가?”  “리더십은 개발될수 있는가?”  “리더는 태어나는 것인가 훈련되는 것인가?”  “리더십은 내적 자질인가 외적 열매인가?”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은지도 어느덧 26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났다.  목사가 된 이후 이제까지 목회자로, 신학교 교수로 섬겨왔고, 현재는 복음 전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사역의 현장에서 리더십을 배우기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리더십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쌓기 위해“Strategic Leadership” 목회학 박사 과정도 이수했다.  그런데 현장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또 리더십에 대한 배움이 확대되면 될수록 나의 마음에 생기는 확신은 리더십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는 것 뿐이다.  나아가 특정상황에서 특정 리더십을 발휘할 경우 특정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리더십의 개발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면 우리가살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더욱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섬기는 리더십–섬김과 리더라는 말 자체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아가 어느 조직이든 “강력한” 리더십을 절실히 필요로하는 이 세대에 “강력한 섬김의 리더십” 이라는 말자체가모순이다.  물론 섬김의 리더십과 약한 리더십이 동일어가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다.

위대한 성경적 인물의 삶과 사역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리더의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적 인물들의 실례에서 리더십 교훈을 받기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이들이 행동했던 행동양식을 이들이 처했던 역사적  환경 속 볼 수 있는 해석학적 눈이다.  이런한 통찰력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눈이 필요하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성서 해석학적 눈이다.  이런 눈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성경적 인물들의 행동양식을 그들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을 배경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말것이다.

리더십이 펼쳐지는 장은 삶과 사역의 한 복판이지 연구실이 아니다.  리더십을 전공한 대학 교수라 할지라도 그에게 사역의 현장이 없다면 그가 진정 리더인지 조차 의심스럽다.  이런 이유로 인해 John Maxwell 은 사진의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을 육백만불에 구입하여John Maxwell Leadership Chair 를 개설하기 원했던 Cornell 대학의 요청을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리더십이 필요없는 연구실에서책과 씨름하는 교수들에게 내가 개발한 리더십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내키지 않습니다.”

앞으로 얼마간 미주침례신문에 리더십에 대한 글을 싣게 되었다.  기독교 리더십의 개발은 성경과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이는 해석학적통찰력을 요구한다.  나아가 삶과 사역의 현장이 없는 리더십의 이론은 망상이며 유령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칼럼을 삶, 해석, 리더십의 차원을 넘나들면서 독자들과 함께 리더의 여로를 걷고 싶다.  아무리 좋은 글도 공감하지 못하는 글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모두가공감할 뿐 도발적 요소가 없는 글이라면 그 글이 독자에게 제시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감하지만 순순히 동의하기에는 뭔가 가슴아린 도발적인 글은 필자와 독자가 함께 대화하며 여행 할 때 가능하다.  리더십에 대해 필자가 다루기 원하는 토픽이 있는 분은 연락주기 바란다